제 지나온 삶과캠프 후기(간증?)입니다.
본래라면 부끄러워서 하지 못할 말들도 많겠으나, 일정중에 캠프의 다른 지체들이 숨김없이 간증하셨던 것을 듣고, 혹시라도 제 이야기가 훌륭한 정면교사의 예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반면교사의 예는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최대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이렇게 글을 씁니다.
제 이야기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은혜를 받을 만한 지체에게 더욱 은혜 부어주셔서 제가 반면교사가 되어 저와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은혜의 삶을 사는 지체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1. 저는 교회생활을 오래하기만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저는 열매맺지못한채로 돌길에 방치된 이름모를 깡마른 잡목과도 같은 삶입니다.
초등학교 때, 맛있는거 먹으러가자는 말에 이끌려 갔던 교회는 당시의 기억을 되돌아보면 간식을 먹으러 가는 곳이었습니다.
저희집이 부유한 집안도 아니었을 뿐더러, 부모님께서 근검절약을 외치며 사시는 분이시다보니, 공식적인 군것질거리는 한 달에 한 번 어쩌다 부모님이 기분이 좋으면 사오시는 뻥튀기였습니다.
그마저도 전 제 입맛에 맞지않아 거의 안먹었습니다. . 제 주 간식거리는 어쩌다 천원씩 받는 용돈으로, 요즘도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파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00원에 1개의 후랑크소세지를 익혀서 양념치킨소스같이 달짝지근한 소스에 굴려가며 익혀서 팔았습니다.
뻥튀기등의 간식으로 부족해서 매일 주일이 기다려졌었습니다. '오늘은 어떤 간식이 나올까?'하면서요.
그렇게 제가 중학교 2학년이 될때쯤이었을까요? 안그래도 작던 교회인데,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교회로 데려왔던 집사님 일가와 교회가 분열이 되었습니다. 안그래도 성도 수가 적던 지방 교회였느데, 말 그대로 반타작이 났습니다.
그 집사님 일가는 혈연으로 4가정이 연결되어 교회를 섬기고 있었고, 어렸던 제가 보기엔 굉장히 교회봉사를 열심히 섬기시던 분이라서 그렇게 갑자기 나가버리실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 밑으로 남은 학생~청년들은 중등부 2명(저포함), 고등부 1명, 초등부 2명, 유치부 1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언제인가, 대예배 찬양인도를 제가 맡게된 것을 기점으로하여 타의 반 의무감 반으로 계속 회장의 직함을 달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도 못하고, 욥기 42장 5절의 말씀의 일부 구절처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의 상태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지식으로만 안체 살았습니다.
그러다 대학교에 들어갈 때 쯤에는 열심히 딴짓을 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하긴 했었는데, 설교 중에 이종선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지혜없는 자가 저였습니다.
제가 공부한 것에서 나오는 것은 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공부했던 것도 시험때만 되면 잊어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11년에 첫 수능을 봤는데, 속된말로 죽을 쒔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아마 평균 4~5등급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건 아무리해도 억울하다 그래서 부모님께 재수를 하고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광주로 가서 반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고백컨데, 저는 쾌락중독입니다. 제가 스트레스를 푸는 두가지 방법이 딱 두가지 있었는데, 그게 판타지나 무협 소설보기와 게임하기였습니다.
게임에 얼마나 빠져들었냐면, 제가 2011년 수능을 봤다했으니, 재수를 했으면 2012수능을 봤겠죠?
제가 어릴때 하던 게임이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라는 게임입니다.
디아블로 3이라는 게임이 2012년 5월에 출시됐습니다.
그래서 그 게임을 정말 열심히 즐겼습니다.
교회 중고등부 교사인 형(저희는 인원이 너무 적어서 당시 지금 제나이였던 청년인 형이 중고등부 교사를 하고, 저는 아동부를 담당했습니다.)과 약속을 했었는데, 저희끼리는 이미 남자들끼리 스타크래프트를 종종 친목목적으로 자주해서 블리자드 아이디가 친구추가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형이 접속할 때 제가 접속해있으면 제가 접속해있다는 알림이 뜹니다.
그래서 아직 그 형에게도 고백 못하고 사과도 못했지만,
그 형이 '인수야?'라고 대화를 걸었을 때 가슴을 졸이면서 일부러 대답을 안하고 있었습니다.
좀 있다 '인수 아니니?''하고 물어봤을 때, 저는 '아뇨 인수 친구입니다. 인수가 이거 대신 키워달라고해서 키우고 있어요.'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식으로 솔직히 게임에 반쯤 미쳐서 살았습니다.
당시에 그렇게 살면서 남의 돈에 손을 댄 경우도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부모님의 돈에서부터였습니다.
저희집은 과일장사를 했어서, 어머니께서도 아버지를 도우러 나가있으실 때가 많았습니다.
또 500원 단위의 과일들도 팔았어서(바나나 반손 등) 따로 동전을 모아두는 도자기로 된 통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100원단위로 몰래 빼가다가, 너무 많이 빼가서 양이 줄어든게 보이니, 500원짜리도 섞어가면서 빼가서 썼습니다.
제가 언젠가 어머니께서 당신의 지갑에서 빳빳한 새 지폐를 지갑에서 꺼내서 주시는 것을 제 머리가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종종 피시방비용이 필요할 때 만원씩 빼서 쓰고, 안들켰다고 좋아하면서 피시방을 갔었습니다.
그리고 바늘도둑이 소도둑된다는 옛 말처럼, 제가 중고등부를 맡고있었는데, 총무도 따로 없었기에 겸임이었습니다.
청년부 통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게 제돈같아서, 그 돈이 10-20만원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지금돈으로 하면 40만원에서 80만원쯤 됐을 것 같습니다.(중학생 때 제가 살던 시골에서 튀김이 4개 천원이었는데, 지금은 서울은 1개에 천원꼴인것으로 역계산했습니다.)
그때 친구가 자기가 휴대폰을 바꾼다고, 휴대폰 살사람? 하는거에 겁도없이 손을 들었습니다.
스마트폰도 아니고, 일반 2g폰이었습니다. 그 폰을 구매하려던 이유는폰당시 제가 하고싶던 알피지 폰게임을 하려고 였습니다.
앞에 교회 학생부 재정 이야기한 것으로 예상하셨겠지만, 그 학생부 재정으로 좋다고 그 휴대폰을 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저에게는 참 원통하게도, 그 휴대폰이 정상작동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열어본적이 없었기때문에, 왜 그런지 그 때 이유를 몰랐습니다. (유심칩때문에)
이렇게 헛된 시간으로 헛된 지식으로만 예수님을 알며 살았었습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모아주신 것 같습니다..
교회의 다른 형의 권유로 저는 ESF라는 대학교 기독학생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저를 잘 아는 교회 형들답게 저를 꼬실 때에 맛있는거 많이 먹을 수 있다고 꼬셨습니다.
세상에, 처음 갈 때가 마침 새친구 초청이라해서 간식도 많이 사서 환영예배를 하는 거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고민할 것도 없이 갔습니다.
그리고 그 동아리는 각 도시 대학교를 거점으로 삼으며 대학생 복음화 목적 및 선교의 초교파적이며 전국적인 동아리인데, 그 곳에서 에서 참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오랜 시간의 짝사랑을 시작하기도 했고, 전국의 동아리에서 모여서 하는 수양회를 가기도 했으며, 처음으로 이단을 대면하기도 했습니다.(이에 대한 이야기현재 받은 마음이 아니기에 추후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크게 깨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바뀌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다짐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제 죄가 너무 깊어서 그저 허탄한 욿림으로만 끝나고 많았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다른 지체들은 돈을 모아서 해외선교를 나가기도 했지만, 저는 이런저런 이유로 해외선교를 한번도 가지 않았습니다.(못한게 아니고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심중으로는 하나님께서 제게만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며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20년에 졸업을 하고 돈을 벌기위해 서울로 왔고, 지금 섬기는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참으로 평소에도 감사했던 것 중 하나는,
주님의 인도하심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생이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 물리적으로 떨어져 살게된 이후에 동생이 집에 올때마다 아버지와 트러블이 생기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동생에게 조금씩 잘 대해줬더니
일상대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눌정도로 회복됐고,앞서 말했던 문제는 예전에 내가 철이 없었지.... 내가 미안해라며 서로 그렇게 말하게 되었습니다.
3. 제 상태는 제 뜻대로 살아온 결과들입니다
제 상태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2011년 수능 이후 2012년 1월 초, 저희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시고, 남자가 스물이 넘으면 독립을 해야한다 라는 말을 저에게 항상 자주 하셔서 저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능이 끝나자, 저에게 방금 말한 이유로 너도 일을 해보라면서 옆에서 장사하시던 생선가게 사장님의 남편분을 통해 공사장에서 일을 하게 됐고, 거기서 발을 구덩이에 굴러 우측 인대가 절단되어 재건수술을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습니다.
다른 얘들은 다 좀 넉넉한 부모님 만나서 재미있게 즐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폭력적이고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서 매일같이 장사를 도와주고해도 내 노고에 대한 감사도 돈도 받고있지 못한채로 살다가 이렇게 다리를 다쳤다는 생각이었습니다.
230mmHg 180mmHg.
이 숫자가 단어만 보고 이게뭔지 짐작가는 분이 있으실까요?
제 가 약을 안먹던 상태에서 측량된 최고혈압과 그 때 같이 계측된 이완기 혈압을 10단위까지만 자른것입니다.
선릉에서 살 당시 다니던 내과원장님이 '어떻게 살아있어요? 젊은 사람이 이러면 곧 죽어요'라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이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살았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12월에 알게된 사실인데,
저는 모야모야병이라는 희귀 난치병이 있었습니다. 이 난치병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우측 중대뇌동맥 뇌경색이었습니다.
그래서 22년 12월에 뇌경색을 앓은 뒤에 주님의 은혜로 23년 4월에 재활병원까지 퇴원을 마쳤습니다.
이후로는 너무나 육체적으로 제대로 달리지도 못하며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듯 체력이 부족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퇴원을 하기 직전에, 스펙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몸도 안좋은데, 일반적인 직장에서 취직이 잘 될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영어공부를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실무적인 일도 배워보자 해서 바리스타 학원도 등록해보자 했습니다.
보통 영어공부르 한다하면 먼저 생각나는게 해커스토익 이런 책일텐데, 저는 그 때 정신이 뭐에 홀렸었는지, 외국인들이 많이 이용하며 영어로 대화할 수 있다는 어플을 설치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기꾼을 만나, 제가 서울생활을 하며 모았던 돈을 모두 잃었습니다.(2년동안 모은3천만원. )
4. 제 마음을 새롭게 하여주시는 하나님
사실이 다니엘 캠프에 오는 것은 제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목사님이 광고시간에 청년부 MT를 본래 계획했으나 다니엘 캠프로 대체하겠다는 광고는 들었습니다.
가겠냐고 세번정도 묻긴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고싶은 마음이 없어 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기에 저는 안가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8월 6일에 '다음주 다니엘 캠프입니다.', '청년들은 다음주에 올 때 짐 챙겨서 오세요'라고 했을 때 '뭐지? 난 간다고 한 적 없는데...?' 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임의로 신청하신줄 알고, 사실 속으로 사모님께 원망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모님... 저는 쉬고싶은데요...'
지금 이 다시 생각해보면, 다니엘 캠프는 하나님께서 목사님과 사모님을 통하여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돌같은 저를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도록 끌어내신 것입니다.
제가 성령의 역사를 강하게 경험하진 못했지만, 제가 캠프 중 내내 아파 타이레놀까지 먹었던 허리가, 거의 마지막쯤 무대로 나가서 입구에서 바라볼때 왼쪽 끄트머리에 서서 기도받은 이후 통증이 확연히 가라앉아 마지막 찬양 페스티벌을 더 즐길수 있었습니다.
예언사역 때 협력사역목사님을 통하여 제게 주신 말씀은
'내가 맞는 말을 하는데, 상대가 안들어줘서 화날때가 많아요?'가 첫번째였습니다.
네 맞습니다. 주님. 특히 부모님과 이야기할 때 그래서 화가 날 때가 많고 갑갑할 때가 많았으며,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이 제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는 항상 제 나름의 제게 합당하고 상식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누군가를 섬기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 해주는 만큼 존중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듯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인수형제를 사랑하신다'
이 부분에 대한 것은 159차 치유대성회를 통하여 제 삶을 더욱 돌아보게 만드셨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인수형제의 기도를 들으신다'였습니다.
제 앞선 문제들 때문에 저는 항상 근심이 많았습니다. 캠프중 들었던 한 간증의 고민은 남을 해치는 것이었지만, 저는 제가 없어지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가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게 제가 힘들어서 하소연했던 이야기들을 주님께서 들으신다고 하시니 안심이 됐습니다.
그리고 협력사역자분께서는 '기도의 형식에 얽매이지마라, 대화하는 것처럼 해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라는 내용의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인도를 했던 김형통 형제님이 은혜를 받는 꿀팁이라며 말해주신대로 일단 옆사람 어깨를 잡고 뛰라는 말에 제 교회의 학성형제의 어깨를 잡고 일단 뜀으로써(지금은 없는 학성. 언제나고마워.)제가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지체들 처럼 팔팔 나는것은 아니지만 살짝씩 뛰면서 찬양을 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해준 다니엘 캠프 섬김이들과 말씀 전하신 목사님들과 협력사역자로 섬겨주신 목사님들과 사모님들과 식사를 섬겨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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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간증은 8월 16일 작성되어 이후의 일들이 미반영 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9월 3~5에 있던 치유대성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한 번 더 만져주시며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글을 작성하는 9월 12일 기준으로 3달간 구하지 못했던 일자리를 구하여 9월 18일부터 교육후 10월에 입사하게될 예정입니다.
저를 다시 살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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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차 다니엘 캠프를 다녀오며.
28차때 하나님께서는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고, 마음에 큰 위로가 됐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찾아왔던 병에 대해서 찾아보고 알아보면서 증상이 그동안 없던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를 묵상하고 이전 캠프를 다녀오고 감사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28차때 이종선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셨던 날짜를 원활하게 쉬기 위해서 10월 입사했을 때부터 1월중 병원일정이 있어 꼭 해당 기간에 쉬어야한다며 입사때 교육담당자와 팀장님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예. 사실 1월 16일엔 꼭 병원을 가지 않아도 됐습니다.그러나 평일에 병원에 가야하는 날이 있었고, 마침 저 1월에는 제가 방문주기가 겹친 신경외과의 교수님께서 학회일정으로 토요오전진료를 쉬게되어, 10월에 방문했었을 때 16일로 잡았습니다. 다른 진료과들까지 합쳐서 15, 16 하고싶었지만,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더군요.)
꼭 가야하는 검사 예약은 1월 19일(금)밖에 없었지만, 회사의 신입사원은 연차가 없고, 월차밖에 존재하지 않기에, 2달을 쉬지않고 근무 할테니, 저때 꼭 쓰게 해주시라 하는 말에 회사에서 '그래. 2달동안 모아서 월차 쓰는거면 ok'라고 허락해줘서 1월 16, 19 연차를 쓸 수 있게 12월중 확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월 14일 주일, 예배를 마친 후 집에 다녀온 이후 교회에 모여 같이 가는 청년들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도착했을 때에는 한참 찬양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사실 꼭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15일 출근에 대한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첫날 일정이 마쳐진 뒤 새벽 2시쯤 귀가해서 평소대로 출근은 했는데, 정말 집중이 하나도 안됐습니다.
잠도 제대로 못자고 몸도 안좋고, 일까지 하고나니 힘들어서 못가겠다고 목사님께 말씀드릴까 생각도 했다가, 어차피 캠프오려고 이렇게 월차 몰아서 잡았는데, 그냥 하자 라는 생각으로 일을 끝나고 가긴 했습니다. 집에서 송내역에 도착하니 저녁 9시 쯤 됐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이종선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바울은 약 서른살부터 인생이 뒤집어졌는데, 일찍 뒤집어질수록 대박이다.' 라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월요일을 마친 후, 화요일 아침에는 예약된 병원에 가기 위해 아침 8시쯤에 교회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후 병원을 마치고 다시 교회로 돌아올 때까지는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지난 성회때 말씀 들었으니까, 은혜 받을만한 때에 더 부어주시겠지.'라는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교회에 다시 도착했을때는 오후 1시 쯤이었습니다.
찬양을 마친 뒤, 곧바로 예언기도 및 기도사역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원래 월요일에 청년 예언시간이었기에 놓쳐서 받을 생각은 안하고 있었는데, 목사님이 어제 못받았으니, 오늘 가서 따로 여쭤보고 받아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여쭤봐야할지 몰라서 본당 밖에 있던 형제 섬김이분께 여쭤봤습니다.
그 섬김이께서는 올라가셔서 받으시면 된다고 하셔서 올라가서 받았습니다.
예언사역을 해주시던 노란 조끼 입으신 사모님께서는(사실 사모님이신지 권사님이신지 목사님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기도해주시며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제 기억으로는 '말씀을 읽고 듣고 행해라'라고 하셨는데, 이게 빌 4:9절의 말씀을 해주신것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2회차에 걸쳐 거듭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참으로 감사하면서도 죄송했습니다.
제가 너무 이기적이라, 제 삶이 너무 무거워 하나님의 사랑을 제가 잘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였습니다.
그리고 이종선 목사님께서 다시 설교해주실 때 '지금 순종하라'라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전에 28차때 처음 왔었을 때는 어린 학생들의 열기와 열정이 너무 뛰어나서 되게 감당하기 벅차고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더 은혜 받고 가자'라고 마음을 바꾸니 '역시 젊음 피가 힘이 있네'라고 생각이 바뀌며, 조금 더 편하게 있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날 점심인지 저녁인지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섬김이들이 여전히 찬양시작 약 30~40분 전부터 미리 연습하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지난 28회차와는 다르게, 한 지체가 갑자기 무대 위로 올라가려다 제지되었다는 것만 기억합니다. 자세한 상황은 제가 무대에서 떨어져 건반이 있는 곳에서 중간쯤 벽에 앉아있던터라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영적 방해등이 심각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마지막 기도시간 때, 방언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준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제가 방언을 할 줄 몰랐기에, 당연히 방언할 줄 아는 사람들을 구분지을 때 모르는 쪽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던중에 마이크 잡은 목사님께서 '할렐루야'를 계속 하라고 하셨고, 할렐루야를 계속 하던 중 제 발음이 바뀌었습니다.
위해서 기도해주시던 사모님께서 뭔가 이상하다 싶으셨는지 이것저것 말씀하셨는데, 소감을 쓰는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캠프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방언을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때쯤 기도하며 한 적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방언'이라는게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교회 권사님들이 하시던 것과 다르니 '아 내가 하는건 방언이 아닌가보구나'하는 식으로 넘어갔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삶 속에서 잊어간 지난 날을 다시 기억하게 해주심에 감사하고, 예전부터 저를 인도하셨음에 감사합니다.
더욱 말씀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깨달아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는 성도가 되도록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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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차 다니엘 캠프를 다녀오며.
처음 담인 목사님께 28차 캠프에 권유를 받을 때만 해도, 이 캠프가 이렇게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진 못했었습니다.
제 성격을 줄여서 표현하면 가늘고 길게를 지향(나서지 않기, 뒤에서 서포트,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 선호) 입니다.
앞으로 나서는걸 싫어하고 카메라등에 잡히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제가 사진을 거부하지 않고, 카메라등이 찍는 곳에 먼저 앞으로 나간 곳은 제 짧은 기억으로는 다니엘 캠프가 처음입니다.
섬김이들의 간증을 들으며 저에게는 간절함과 치열함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이전의 삶의 모습에서도 무난하게 살아와서 속상한 일들은 많았지만, 울부짖을 정도로 격한 감정을 표출할 일이 없었고 사실 아직도 울부짖는 그런 표현이나 격한 표출이 안되긴 합니다.
제가 눈물을 많이 흘리지 않는것에는 이런 것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니엘 캠프는 영적 반응이 없는 제게도 마음의 여유와 마음에 도전을 줬습니다.
28차 다니엘캠프를다녀온 이후부터는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겨 저밖에 없던 방에 워터코인이라는 식물을 비롯해서 여러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고, 24년7월말-8월 초부터는 몇가지 수초와 새우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28차 캠프 이후부터, qt를 최대한 해야겠다고 다짐은 했었지만, 사실 나눈다는 것 자체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다 보니 초반 몇 일 에는 교회에서 하는 qt책을 가지고 하고 교회 청년부에서 나누는 것을 안하다보니, 점점 qt도 안하게 되는 모습을 갈견했습니다.
29차 캠프때에는 다시 새롭게 마음을 먹었고, 그 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해서 늦게 올리는 한이 있더라도 qt나눔을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지금까지 약 80-90%정도는 지킨 것 같습니다.(기록을 일일히 확인하지 않아서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저의 모습을 이전 청년부 회장님께서 보셨는지 권유를 받아서 교회에서 청년부 카톡방을 담당하며 qt책의 본문과 해설파트를 매일 올리는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회장등의 직분은 부담스럽고, 어떻게 돕고는 싶던 제게 딱 맞는 역할이었습니다
29차 캠프 이후, 이전에 다니고있던 상담사 외주업체를 그만두고 쉬고있던 제게, 목사님께서 에너지관리 산업기사과정이 있다며 정보를 말씀해주시며 해보라고 권유를 해주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제게는 정말 불만이 많았습니다.
저는 제가 살아온 삶에서 이과나 공과와 연결된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제가 처음 왔을때 간단한 신상 문답을 주고받았기에 '내 삶을 어느 정도 알고 계시고, 몸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인 것도 알고계실을텐데, 왜 이런 과정을 추천하시는거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이, 목사님께서는 나보다 더 기도를 많이 하시니,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니 목사님께 대신 전달해주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전화로 '내가 하라고는 했었지만, 네가 더 알아보고 준비해야지'라고 말씀하실 때, '목사님이 기도하시고 해주신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단순한 정보전달이셨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이면 자격증을 취득하도록 도와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며 과정을 신청했습니다.
캠프 29와 30차의 예언 사역 시간 때에는 사역자님들을 통해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저는 영적인 반응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사역자님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랑을 하신다는 말씀이 들을 때 눈물은 약간씩 나지만, 덜 와닿았습니다.
그래도 캠프에 갈 때마다 나를 바꾸는 것을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0차 캠프를 통해 저는 아직 부족하고 깨져야할 것이 많음을 생각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mbti에 스스로를 한정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언급한 것처럼, 저는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고, mbti를 알게 된 이후(약 2010년대)에는 아. 나는 Infp니까 이러는게 자연스럽고 맞는거야 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캠프를 마치고 남아서 첫차를 기다리며 기도를 마친 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생각은 위에서 언급했던 mbti에 관한 것이었이었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니 mbti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방법이 아니며, 인간이 만든 분류법일 뿐이니 이를 참고할수는 있지언정 이에 얽매여 스스로를 단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말씀과 기도에 힘쓰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고 몇 가지 기도제목들도 가지게 됐습니다.
9월 4,6일에 있을 에너지관리 산업기사 시험에 관해서, 시험이라는 것에 너무 매몰되지 않고준비할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다른 기도제목은 상상에 관련된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상상을 하고자 할 때 상이 잡히지 않아 상상을 해보지 못해서 상상을 개념적으로만 알고있습니다.
여러 목사님들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 십자가에서 흐르는 보혈을 상상하라고 하시는데, 상상을 해본적이 없고, 상상을 하려해도 그 상이 떠오르거나 잡히는게 없습니다.
제가 눈을 감고 상상하려 노력할 때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며 주변의 밝기변화에 따라 그를 감각할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상상할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겠습니다.
섬김이가 된다면, 화장실 청소 등 궂은 일 등에서 봉사하고싶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에 참여하는 생각으로 기쁨으로 섬기며 참여하겠습니다.
제 지나온 삶과캠프 후기(간증?)입니다.
본래라면 부끄러워서 하지 못할 말들도 많겠으나, 일정중에 캠프의 다른 지체들이 숨김없이 간증하셨던 것을 듣고, 혹시라도 제 이야기가 훌륭한 정면교사의 예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반면교사의 예는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최대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이렇게 글을 씁니다.
제 이야기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은혜를 받을 만한 지체에게 더욱 은혜 부어주셔서 제가 반면교사가 되어 저와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은혜의 삶을 사는 지체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1. 저는 교회생활을 오래하기만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저는 열매맺지못한채로 돌길에 방치된 이름모를 깡마른 잡목과도 같은 삶입니다.
초등학교 때, 맛있는거 먹으러가자는 말에 이끌려 갔던 교회는 당시의 기억을 되돌아보면 간식을 먹으러 가는 곳이었습니다.
저희집이 부유한 집안도 아니었을 뿐더러, 부모님께서 근검절약을 외치며 사시는 분이시다보니, 공식적인 군것질거리는 한 달에 한 번 어쩌다 부모님이 기분이 좋으면 사오시는 뻥튀기였습니다.
그마저도 전 제 입맛에 맞지않아 거의 안먹었습니다. . 제 주 간식거리는 어쩌다 천원씩 받는 용돈으로, 요즘도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파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00원에 1개의 후랑크소세지를 익혀서 양념치킨소스같이 달짝지근한 소스에 굴려가며 익혀서 팔았습니다.
뻥튀기등의 간식으로 부족해서 매일 주일이 기다려졌었습니다. '오늘은 어떤 간식이 나올까?'하면서요.
그렇게 제가 중학교 2학년이 될때쯤이었을까요? 안그래도 작던 교회인데,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교회로 데려왔던 집사님 일가와 교회가 분열이 되었습니다. 안그래도 성도 수가 적던 지방 교회였느데, 말 그대로 반타작이 났습니다.
그 집사님 일가는 혈연으로 4가정이 연결되어 교회를 섬기고 있었고, 어렸던 제가 보기엔 굉장히 교회봉사를 열심히 섬기시던 분이라서 그렇게 갑자기 나가버리실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 밑으로 남은 학생~청년들은 중등부 2명(저포함), 고등부 1명, 초등부 2명, 유치부 1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언제인가, 대예배 찬양인도를 제가 맡게된 것을 기점으로하여 타의 반 의무감 반으로 계속 회장의 직함을 달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도 못하고, 욥기 42장 5절의 말씀의 일부 구절처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의 상태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지식으로만 안체 살았습니다.
그러다 대학교에 들어갈 때 쯤에는 열심히 딴짓을 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하긴 했었는데, 설교 중에 이종선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지혜없는 자가 저였습니다.
제가 공부한 것에서 나오는 것은 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공부했던 것도 시험때만 되면 잊어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11년에 첫 수능을 봤는데, 속된말로 죽을 쒔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아마 평균 4~5등급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건 아무리해도 억울하다 그래서 부모님께 재수를 하고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광주로 가서 반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고백컨데, 저는 쾌락중독입니다. 제가 스트레스를 푸는 두가지 방법이 딱 두가지 있었는데, 그게 판타지나 무협 소설보기와 게임하기였습니다.
게임에 얼마나 빠져들었냐면, 제가 2011년 수능을 봤다했으니, 재수를 했으면 2012수능을 봤겠죠?
제가 어릴때 하던 게임이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라는 게임입니다.
디아블로 3이라는 게임이 2012년 5월에 출시됐습니다.
그래서 그 게임을 정말 열심히 즐겼습니다.
교회 중고등부 교사인 형(저희는 인원이 너무 적어서 당시 지금 제나이였던 청년인 형이 중고등부 교사를 하고, 저는 아동부를 담당했습니다.)과 약속을 했었는데, 저희끼리는 이미 남자들끼리 스타크래프트를 종종 친목목적으로 자주해서 블리자드 아이디가 친구추가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형이 접속할 때 제가 접속해있으면 제가 접속해있다는 알림이 뜹니다.
그래서 아직 그 형에게도 고백 못하고 사과도 못했지만,
그 형이 '인수야?'라고 대화를 걸었을 때 가슴을 졸이면서 일부러 대답을 안하고 있었습니다.
좀 있다 '인수 아니니?''하고 물어봤을 때, 저는 '아뇨 인수 친구입니다. 인수가 이거 대신 키워달라고해서 키우고 있어요.'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식으로 솔직히 게임에 반쯤 미쳐서 살았습니다.
당시에 그렇게 살면서 남의 돈에 손을 댄 경우도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부모님의 돈에서부터였습니다.
저희집은 과일장사를 했어서, 어머니께서도 아버지를 도우러 나가있으실 때가 많았습니다.
또 500원 단위의 과일들도 팔았어서(바나나 반손 등) 따로 동전을 모아두는 도자기로 된 통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100원단위로 몰래 빼가다가, 너무 많이 빼가서 양이 줄어든게 보이니, 500원짜리도 섞어가면서 빼가서 썼습니다.
제가 언젠가 어머니께서 당신의 지갑에서 빳빳한 새 지폐를 지갑에서 꺼내서 주시는 것을 제 머리가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종종 피시방비용이 필요할 때 만원씩 빼서 쓰고, 안들켰다고 좋아하면서 피시방을 갔었습니다.
그리고 바늘도둑이 소도둑된다는 옛 말처럼, 제가 중고등부를 맡고있었는데, 총무도 따로 없었기에 겸임이었습니다.
청년부 통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게 제돈같아서, 그 돈이 10-20만원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지금돈으로 하면 40만원에서 80만원쯤 됐을 것 같습니다.(중학생 때 제가 살던 시골에서 튀김이 4개 천원이었는데, 지금은 서울은 1개에 천원꼴인것으로 역계산했습니다.)
그때 친구가 자기가 휴대폰을 바꾼다고, 휴대폰 살사람? 하는거에 겁도없이 손을 들었습니다.
스마트폰도 아니고, 일반 2g폰이었습니다. 그 폰을 구매하려던 이유는폰당시 제가 하고싶던 알피지 폰게임을 하려고 였습니다.
앞에 교회 학생부 재정 이야기한 것으로 예상하셨겠지만, 그 학생부 재정으로 좋다고 그 휴대폰을 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저에게는 참 원통하게도, 그 휴대폰이 정상작동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열어본적이 없었기때문에, 왜 그런지 그 때 이유를 몰랐습니다. (유심칩때문에)
이렇게 헛된 시간으로 헛된 지식으로만 예수님을 알며 살았었습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모아주신 것 같습니다..
교회의 다른 형의 권유로 저는 ESF라는 대학교 기독학생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저를 잘 아는 교회 형들답게 저를 꼬실 때에 맛있는거 많이 먹을 수 있다고 꼬셨습니다.
세상에, 처음 갈 때가 마침 새친구 초청이라해서 간식도 많이 사서 환영예배를 하는 거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고민할 것도 없이 갔습니다.
그리고 그 동아리는 각 도시 대학교를 거점으로 삼으며 대학생 복음화 목적 및 선교의 초교파적이며 전국적인 동아리인데, 그 곳에서 에서 참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오랜 시간의 짝사랑을 시작하기도 했고, 전국의 동아리에서 모여서 하는 수양회를 가기도 했으며, 처음으로 이단을 대면하기도 했습니다.(이에 대한 이야기현재 받은 마음이 아니기에 추후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크게 깨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바뀌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다짐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제 죄가 너무 깊어서 그저 허탄한 욿림으로만 끝나고 많았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다른 지체들은 돈을 모아서 해외선교를 나가기도 했지만, 저는 이런저런 이유로 해외선교를 한번도 가지 않았습니다.(못한게 아니고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심중으로는 하나님께서 제게만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며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20년에 졸업을 하고 돈을 벌기위해 서울로 왔고, 지금 섬기는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참으로 평소에도 감사했던 것 중 하나는,
주님의 인도하심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생이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 물리적으로 떨어져 살게된 이후에 동생이 집에 올때마다 아버지와 트러블이 생기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동생에게 조금씩 잘 대해줬더니
일상대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눌정도로 회복됐고,앞서 말했던 문제는 예전에 내가 철이 없었지.... 내가 미안해라며 서로 그렇게 말하게 되었습니다.
3. 제 상태는 제 뜻대로 살아온 결과들입니다
제 상태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2011년 수능 이후 2012년 1월 초, 저희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시고, 남자가 스물이 넘으면 독립을 해야한다 라는 말을 저에게 항상 자주 하셔서 저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능이 끝나자, 저에게 방금 말한 이유로 너도 일을 해보라면서 옆에서 장사하시던 생선가게 사장님의 남편분을 통해 공사장에서 일을 하게 됐고, 거기서 발을 구덩이에 굴러 우측 인대가 절단되어 재건수술을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습니다.
다른 얘들은 다 좀 넉넉한 부모님 만나서 재미있게 즐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폭력적이고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서 매일같이 장사를 도와주고해도 내 노고에 대한 감사도 돈도 받고있지 못한채로 살다가 이렇게 다리를 다쳤다는 생각이었습니다.
230mmHg 180mmHg.
이 숫자가 단어만 보고 이게뭔지 짐작가는 분이 있으실까요?
제 가 약을 안먹던 상태에서 측량된 최고혈압과 그 때 같이 계측된 이완기 혈압을 10단위까지만 자른것입니다.
선릉에서 살 당시 다니던 내과원장님이 '어떻게 살아있어요? 젊은 사람이 이러면 곧 죽어요'라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이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살았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12월에 알게된 사실인데,
저는 모야모야병이라는 희귀 난치병이 있었습니다. 이 난치병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우측 중대뇌동맥 뇌경색이었습니다.
그래서 22년 12월에 뇌경색을 앓은 뒤에 주님의 은혜로 23년 4월에 재활병원까지 퇴원을 마쳤습니다.
이후로는 너무나 육체적으로 제대로 달리지도 못하며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듯 체력이 부족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퇴원을 하기 직전에, 스펙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몸도 안좋은데, 일반적인 직장에서 취직이 잘 될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영어공부를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실무적인 일도 배워보자 해서 바리스타 학원도 등록해보자 했습니다.
보통 영어공부르 한다하면 먼저 생각나는게 해커스토익 이런 책일텐데, 저는 그 때 정신이 뭐에 홀렸었는지, 외국인들이 많이 이용하며 영어로 대화할 수 있다는 어플을 설치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기꾼을 만나, 제가 서울생활을 하며 모았던 돈을 모두 잃었습니다.(2년동안 모은3천만원. )
4. 제 마음을 새롭게 하여주시는 하나님
사실이 다니엘 캠프에 오는 것은 제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목사님이 광고시간에 청년부 MT를 본래 계획했으나 다니엘 캠프로 대체하겠다는 광고는 들었습니다.
가겠냐고 세번정도 묻긴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고싶은 마음이 없어 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기에 저는 안가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8월 6일에 '다음주 다니엘 캠프입니다.', '청년들은 다음주에 올 때 짐 챙겨서 오세요'라고 했을 때 '뭐지? 난 간다고 한 적 없는데...?' 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임의로 신청하신줄 알고, 사실 속으로 사모님께 원망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모님... 저는 쉬고싶은데요...'
지금 이 다시 생각해보면, 다니엘 캠프는 하나님께서 목사님과 사모님을 통하여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돌같은 저를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도록 끌어내신 것입니다.
제가 성령의 역사를 강하게 경험하진 못했지만, 제가 캠프 중 내내 아파 타이레놀까지 먹었던 허리가, 거의 마지막쯤 무대로 나가서 입구에서 바라볼때 왼쪽 끄트머리에 서서 기도받은 이후 통증이 확연히 가라앉아 마지막 찬양 페스티벌을 더 즐길수 있었습니다.
예언사역 때 협력사역목사님을 통하여 제게 주신 말씀은
'내가 맞는 말을 하는데, 상대가 안들어줘서 화날때가 많아요?'가 첫번째였습니다.
네 맞습니다. 주님. 특히 부모님과 이야기할 때 그래서 화가 날 때가 많고 갑갑할 때가 많았으며,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이 제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는 항상 제 나름의 제게 합당하고 상식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누군가를 섬기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 해주는 만큼 존중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듯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인수형제를 사랑하신다'
이 부분에 대한 것은 159차 치유대성회를 통하여 제 삶을 더욱 돌아보게 만드셨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인수형제의 기도를 들으신다'였습니다.
제 앞선 문제들 때문에 저는 항상 근심이 많았습니다. 캠프중 들었던 한 간증의 고민은 남을 해치는 것이었지만, 저는 제가 없어지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가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게 제가 힘들어서 하소연했던 이야기들을 주님께서 들으신다고 하시니 안심이 됐습니다.
그리고 협력사역자분께서는 '기도의 형식에 얽매이지마라, 대화하는 것처럼 해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라는 내용의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인도를 했던 김형통 형제님이 은혜를 받는 꿀팁이라며 말해주신대로 일단 옆사람 어깨를 잡고 뛰라는 말에 제 교회의 학성형제의 어깨를 잡고 일단 뜀으로써(지금은 없는 학성. 언제나고마워.)제가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지체들 처럼 팔팔 나는것은 아니지만 살짝씩 뛰면서 찬양을 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해준 다니엘 캠프 섬김이들과 말씀 전하신 목사님들과 협력사역자로 섬겨주신 목사님들과 사모님들과 식사를 섬겨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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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간증은 8월 16일 작성되어 이후의 일들이 미반영 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9월 3~5에 있던 치유대성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한 번 더 만져주시며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글을 작성하는 9월 12일 기준으로 3달간 구하지 못했던 일자리를 구하여 9월 18일부터 교육후 10월에 입사하게될 예정입니다.
저를 다시 살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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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차 다니엘 캠프를 다녀오며.
28차때 하나님께서는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고, 마음에 큰 위로가 됐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찾아왔던 병에 대해서 찾아보고 알아보면서 증상이 그동안 없던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를 묵상하고 이전 캠프를 다녀오고 감사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28차때 이종선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셨던 날짜를 원활하게 쉬기 위해서 10월 입사했을 때부터 1월중 병원일정이 있어 꼭 해당 기간에 쉬어야한다며 입사때 교육담당자와 팀장님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예. 사실 1월 16일엔 꼭 병원을 가지 않아도 됐습니다.그러나 평일에 병원에 가야하는 날이 있었고, 마침 저 1월에는 제가 방문주기가 겹친 신경외과의 교수님께서 학회일정으로 토요오전진료를 쉬게되어, 10월에 방문했었을 때 16일로 잡았습니다. 다른 진료과들까지 합쳐서 15, 16 하고싶었지만,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더군요.)
꼭 가야하는 검사 예약은 1월 19일(금)밖에 없었지만, 회사의 신입사원은 연차가 없고, 월차밖에 존재하지 않기에, 2달을 쉬지않고 근무 할테니, 저때 꼭 쓰게 해주시라 하는 말에 회사에서 '그래. 2달동안 모아서 월차 쓰는거면 ok'라고 허락해줘서 1월 16, 19 연차를 쓸 수 있게 12월중 확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월 14일 주일, 예배를 마친 후 집에 다녀온 이후 교회에 모여 같이 가는 청년들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도착했을 때에는 한참 찬양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사실 꼭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15일 출근에 대한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첫날 일정이 마쳐진 뒤 새벽 2시쯤 귀가해서 평소대로 출근은 했는데, 정말 집중이 하나도 안됐습니다.
잠도 제대로 못자고 몸도 안좋고, 일까지 하고나니 힘들어서 못가겠다고 목사님께 말씀드릴까 생각도 했다가, 어차피 캠프오려고 이렇게 월차 몰아서 잡았는데, 그냥 하자 라는 생각으로 일을 끝나고 가긴 했습니다. 집에서 송내역에 도착하니 저녁 9시 쯤 됐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이종선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바울은 약 서른살부터 인생이 뒤집어졌는데, 일찍 뒤집어질수록 대박이다.' 라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월요일을 마친 후, 화요일 아침에는 예약된 병원에 가기 위해 아침 8시쯤에 교회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후 병원을 마치고 다시 교회로 돌아올 때까지는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지난 성회때 말씀 들었으니까, 은혜 받을만한 때에 더 부어주시겠지.'라는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교회에 다시 도착했을때는 오후 1시 쯤이었습니다.
찬양을 마친 뒤, 곧바로 예언기도 및 기도사역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원래 월요일에 청년 예언시간이었기에 놓쳐서 받을 생각은 안하고 있었는데, 목사님이 어제 못받았으니, 오늘 가서 따로 여쭤보고 받아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여쭤봐야할지 몰라서 본당 밖에 있던 형제 섬김이분께 여쭤봤습니다.
그 섬김이께서는 올라가셔서 받으시면 된다고 하셔서 올라가서 받았습니다.
예언사역을 해주시던 노란 조끼 입으신 사모님께서는(사실 사모님이신지 권사님이신지 목사님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기도해주시며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제 기억으로는 '말씀을 읽고 듣고 행해라'라고 하셨는데, 이게 빌 4:9절의 말씀을 해주신것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2회차에 걸쳐 거듭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참으로 감사하면서도 죄송했습니다.
제가 너무 이기적이라, 제 삶이 너무 무거워 하나님의 사랑을 제가 잘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였습니다.
그리고 이종선 목사님께서 다시 설교해주실 때 '지금 순종하라'라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전에 28차때 처음 왔었을 때는 어린 학생들의 열기와 열정이 너무 뛰어나서 되게 감당하기 벅차고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더 은혜 받고 가자'라고 마음을 바꾸니 '역시 젊음 피가 힘이 있네'라고 생각이 바뀌며, 조금 더 편하게 있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날 점심인지 저녁인지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섬김이들이 여전히 찬양시작 약 30~40분 전부터 미리 연습하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지난 28회차와는 다르게, 한 지체가 갑자기 무대 위로 올라가려다 제지되었다는 것만 기억합니다. 자세한 상황은 제가 무대에서 떨어져 건반이 있는 곳에서 중간쯤 벽에 앉아있던터라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영적 방해등이 심각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마지막 기도시간 때, 방언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준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제가 방언을 할 줄 몰랐기에, 당연히 방언할 줄 아는 사람들을 구분지을 때 모르는 쪽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던중에 마이크 잡은 목사님께서 '할렐루야'를 계속 하라고 하셨고, 할렐루야를 계속 하던 중 제 발음이 바뀌었습니다.
위해서 기도해주시던 사모님께서 뭔가 이상하다 싶으셨는지 이것저것 말씀하셨는데, 소감을 쓰는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캠프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방언을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때쯤 기도하며 한 적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방언'이라는게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교회 권사님들이 하시던 것과 다르니 '아 내가 하는건 방언이 아닌가보구나'하는 식으로 넘어갔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삶 속에서 잊어간 지난 날을 다시 기억하게 해주심에 감사하고, 예전부터 저를 인도하셨음에 감사합니다.
더욱 말씀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깨달아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는 성도가 되도록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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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차 다니엘 캠프를 다녀오며.
처음 담인 목사님께 28차 캠프에 권유를 받을 때만 해도, 이 캠프가 이렇게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진 못했었습니다.
제 성격을 줄여서 표현하면 가늘고 길게를 지향(나서지 않기, 뒤에서 서포트,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 선호) 입니다.
앞으로 나서는걸 싫어하고 카메라등에 잡히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제가 사진을 거부하지 않고, 카메라등이 찍는 곳에 먼저 앞으로 나간 곳은 제 짧은 기억으로는 다니엘 캠프가 처음입니다.
섬김이들의 간증을 들으며 저에게는 간절함과 치열함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이전의 삶의 모습에서도 무난하게 살아와서 속상한 일들은 많았지만, 울부짖을 정도로 격한 감정을 표출할 일이 없었고 사실 아직도 울부짖는 그런 표현이나 격한 표출이 안되긴 합니다.
제가 눈물을 많이 흘리지 않는것에는 이런 것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니엘 캠프는 영적 반응이 없는 제게도 마음의 여유와 마음에 도전을 줬습니다.
28차 다니엘캠프를다녀온 이후부터는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겨 저밖에 없던 방에 워터코인이라는 식물을 비롯해서 여러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고, 24년7월말-8월 초부터는 몇가지 수초와 새우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28차 캠프 이후부터, qt를 최대한 해야겠다고 다짐은 했었지만, 사실 나눈다는 것 자체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다 보니 초반 몇 일 에는 교회에서 하는 qt책을 가지고 하고 교회 청년부에서 나누는 것을 안하다보니, 점점 qt도 안하게 되는 모습을 갈견했습니다.
29차 캠프때에는 다시 새롭게 마음을 먹었고, 그 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해서 늦게 올리는 한이 있더라도 qt나눔을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지금까지 약 80-90%정도는 지킨 것 같습니다.(기록을 일일히 확인하지 않아서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저의 모습을 이전 청년부 회장님께서 보셨는지 권유를 받아서 교회에서 청년부 카톡방을 담당하며 qt책의 본문과 해설파트를 매일 올리는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회장등의 직분은 부담스럽고, 어떻게 돕고는 싶던 제게 딱 맞는 역할이었습니다
29차 캠프 이후, 이전에 다니고있던 상담사 외주업체를 그만두고 쉬고있던 제게, 목사님께서 에너지관리 산업기사과정이 있다며 정보를 말씀해주시며 해보라고 권유를 해주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제게는 정말 불만이 많았습니다.
저는 제가 살아온 삶에서 이과나 공과와 연결된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제가 처음 왔을때 간단한 신상 문답을 주고받았기에 '내 삶을 어느 정도 알고 계시고, 몸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인 것도 알고계실을텐데, 왜 이런 과정을 추천하시는거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이, 목사님께서는 나보다 더 기도를 많이 하시니,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니 목사님께 대신 전달해주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전화로 '내가 하라고는 했었지만, 네가 더 알아보고 준비해야지'라고 말씀하실 때, '목사님이 기도하시고 해주신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단순한 정보전달이셨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이면 자격증을 취득하도록 도와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며 과정을 신청했습니다.
캠프 29와 30차의 예언 사역 시간 때에는 사역자님들을 통해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저는 영적인 반응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사역자님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랑을 하신다는 말씀이 들을 때 눈물은 약간씩 나지만, 덜 와닿았습니다.
그래도 캠프에 갈 때마다 나를 바꾸는 것을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0차 캠프를 통해 저는 아직 부족하고 깨져야할 것이 많음을 생각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mbti에 스스로를 한정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언급한 것처럼, 저는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고, mbti를 알게 된 이후(약 2010년대)에는 아. 나는 Infp니까 이러는게 자연스럽고 맞는거야 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캠프를 마치고 남아서 첫차를 기다리며 기도를 마친 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생각은 위에서 언급했던 mbti에 관한 것이었이었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니 mbti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방법이 아니며, 인간이 만든 분류법일 뿐이니 이를 참고할수는 있지언정 이에 얽매여 스스로를 단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말씀과 기도에 힘쓰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고 몇 가지 기도제목들도 가지게 됐습니다.
9월 4,6일에 있을 에너지관리 산업기사 시험에 관해서, 시험이라는 것에 너무 매몰되지 않고준비할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다른 기도제목은 상상에 관련된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상상을 하고자 할 때 상이 잡히지 않아 상상을 해보지 못해서 상상을 개념적으로만 알고있습니다.
여러 목사님들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 십자가에서 흐르는 보혈을 상상하라고 하시는데, 상상을 해본적이 없고, 상상을 하려해도 그 상이 떠오르거나 잡히는게 없습니다.
제가 눈을 감고 상상하려 노력할 때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며 주변의 밝기변화에 따라 그를 감각할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상상할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겠습니다.
섬김이가 된다면, 화장실 청소 등 궂은 일 등에서 봉사하고싶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에 참여하는 생각으로 기쁨으로 섬기며 참여하겠습니다.